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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성큼 가을이 왔다.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다들 좋다고 그래서 아껴두었던 책을, 여름에 시작해서 가을까지 읽었다. 중간 중간 다른 책을 읽기도 했지만, 놓을 수가 없어 매일 가방에 가지고 다니고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딸내미가 우유를 쏟아서 책이 다 젖었다. 그렇게 구깃구깃한 책을 한자 한자 소중히 읽어나갔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리움과 관련된 것들이어서, 때론 마음이 서늘해졌고, 때론 마음이 아팠다. 좋은 책이었다. 여름을 좋은 책과 잘 보냈다. 오래 여운이 남을 것 같다.

 

 

  "애가 머리가 커서 모자가 잘 안 맞거든. 근데..." 아줌마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추더니 입을 꾹 다물고 코를 훌쩍였다. 그녀가 울음을 삼키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었기에 나는 아줌마 옆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응웬 아줌마.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p.88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 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 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이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었다. 그리웠을 것이다. 말로는 그때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저, 가끔 말을 들어주는 친구라도 될 일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곁을 줄 일이었다. 그녀가 내 엄마여서가 아니라 오래 외로웠던 사람이었기에.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 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 p.91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p.116

 

 

 이십오 년 전, 그녀는 엄마를 따라 폴란드 출신 교황이 집전했던 미사를 보러 서울에 왔었다. 지금은 사라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그 미사에는 육십오만 명의 신자들이 참석했었다고 한다. 그날에 대해 그녀가 기억하는 건 엄마가 그녀의 입속에 넣어준 자두사탕의 맛이다. 엄마는 사탕이 행여 그녀의 목에 걸릴까봐 이로 사탕을 깨물어서 그 조각조각을 그녀의 임속에 넣어주었다. 따뜻하면서도 선선한 가을 날씨였고, 그녀는 엄마의 가슴팍에 달콤한 침을 흘리면서 잠들었다. 볼에 닿은 엄마의 공단 한복은 꺼슬꺼슬했다. p.216

 

 

  딸이 태어난 후로는 그늘진 마음에도 빛이 들었다. 마음속 가장 차가운 구석도 딸애가 발을 디디면 따뜻하게 풀어졌다. 여자가 애써 세워둔 축대며 울타리들, 딸애의 손이 닿기만 했는데도 허물어지고, 그애의 웃음소리가 비가 되어 말라붙은 시내에 물이 흘렀다. 있는 마음 없는 마음을 다 주면서도 그 마음이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까봐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마음 안에서, 따뜻했다.

  아이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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