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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 신경숙

 

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문학동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의 삶을 위로받고 치유받을 때가 있다. 가끔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며 나의 삶에 감사함을 얻기도 하지만, 그건 조금 이기적인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들의 삶이 나의 삶보다 못하다고 단정짓는다는 점에 대해.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좋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에 위로가 된다. 모든 단편이 다 좋았는데 <어두어진 후에>와 <성문 앞 보리수>가 특히 좋았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자신의 엄마, 할머니, 형을 잃는다. 교회 앞, 정원이 딸린 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집에 살고 있단 이유만으로 그들은 살해당한다. 범인은 어린 시절 보낸 마을에 교회 앞에 정원이 딸린 부잣집을 증오하며 자랐다고 했다.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잃고 그는 떠돌기 시작한다. 2년을 그렇게 지낸다. 어느 날 절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돈이 다 떨어졌다. 남자는 매표소의 여자 직원에게 돈이 없다고, 그냥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고 여자는 그러라고 한다. 남자는 배가 고픈데 밥도 사달라고 하고, 술이 먹고 싶은데 술도 한 잔 사달라고 하고, 잘 곳이 없는데 잠도 재워달라고 한다. 남자의 이 모든 요구에 여자는 '알았어요'라고 대답한다. 여자의 집, 그 곳엔 어린 동생 둘과 아파서 누워계시는 어머니가 있다. 여자의 방에 있는 앉은뱅이 탁자위엔 스탠드와 잘 개켜둔 손수건이 몇 장이 놓여있다.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배추를 뽑아 다듬는 것으로 시작된 여자의 아침은 매우 분주했다. 여자네 집 한쪽 마당은 텃밭이었다. 거기에 청배추와 무와 가을 시금치와 아욱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제쯤 아욱을 베어다가 된장국을 끓여 먹었는지 아욱잎들엔 칼자국이 나 있었다. (중략) 새벽에 뽑은 배추로 끓인 것일까. 상 위의 밥그릇들 옆에는 파란 배추된장국이 한 그릇씩 놓여 있었다. 파를 종종 썰어넣어 무친 생굴에서 참기름 냄새가 맡아졌다. 큼직한 깍두기, 멸치볶음, 깻잎, 계란찜. 언제 만들었는지 숭늉이 담긴 큰 양푼이 밥상 아래 놓여 있다. 앉으세요. 여자가 한번 더 권했을 때야 남자는 그들 식구들 속에 끼어 앉았다. 남자는 그들과 한식구처럼 밥을 먹었다. 소년이 생굴무침을 더운 밥 위에 떠다 얹은 뒤 싹싹 비비기에 남자도 그러했다. 소녀가 배춧국이 든 대접을 들고 국물을 후루룩 마시기에 남자도 그리했다. 밥을 먹는 동안 여자는 동생들에게 둘 중 한 사람은 학교 끝나면 일찍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녀가 입가에 굴무침에 들어있던 파를 붙인 채 자기가 일찍 올 수 있다고 대답했다. 아침밥을 다 먹은 후 여자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소녀가 설거지를 하고 소년이 개밥을 주었다. <어두워진 후에> p.148

 

  남자는 이 집을 나올 때 여자의 손수건을 집어 챙긴다. 여자의 것 무엇이든 하나만 지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집에 갈 차비까지 받는다. 남자는 새 신발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신발을 신고 2년 동안 떠나온 자신의 집에 가보리라 생각하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S, 경, 수미는 친구다. 경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어느 날 남편에게 그때까지 헤어지지 못한 첫사랑이 있음을 알게 된다. 경은 친구들에게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고 독일로 가야겠다고 말하고는 떠난다. S와 수미는 아무 것도 모른채 그렇게 경을 보낸다. 수미는 결혼을 하고 억척같이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한다. 입주하던 날 밤, 남편과 처음으로 포도주를 사서 마시던 날, 수미는 베란다에서 '나 갈래요'라는 말만 남기고 뛰어내린다. 독일에 있는 경은 어느 순간부터 수미에게 오던 연락이 끊기고 그렇게 몇 년이 더 흐른다. 그리고 S와 경은 독일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동안 있었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툭, 꺼낸다. 

 

  가끔 지금 왜 내가 여기에 있나, 생경해서 자다가 벌떡 일어날 때가 있어. 내가 왜 여기 있나.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말들을 하면서 살아야 했었는데...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미안. 수미도 나도 너를 외롭게 했겠다는 생각. 십년쯤 마음속의 애기를 안 하고 살다보니 나중엔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게 되더라. 수미도 그랬겠지. 그렇게 되더라. 헤어질 때 네게 줬던 그 꽃뿌리는 백합 구군이야. 하나하나 세어봤더니 열다섯 뿌리더라. 작년 시월에 여기 마당에 서너 뿌리 심어뒀더니 번져서 캐간 거였다. 수미가 집을 마련했다기에 수미네 가져다주라고 하려던 거였는데. 그거 네가 심어둬라. 매년 곱으로 퍼질 거야. 그리고 S야, 부탁이 있는데 너 사는 곳 근처에 값싼 집이 있으면 연락 해주겠니? 방은 하나만 있어도 되는데... 방이 하나 있는 집은 없을까? 방은 하나여도 괜찮은데 마당이 좀 있었으면 좋겠구나. 여력이 생기면 너 있는 근처에 집을 사놓고 싶어. 이제는 그쪽에 아무 삶이 없다고 해도 돌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이렇게 다른 삶이 생겼네. 인생이 그래서 만만한 게 아닌 거겠지. 나중에 혼자가 되면 그곳으로 돌아가 너 가까이에서 예전처럼 살고 싶어. 백합을 잘 키웠다가 그때 좀 나눠줘. <성문 앞 보리수> p.186

 

 

  그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그 사람은 지금 책 같은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힘이 들지만, 그 힘듦이 조금 가라앉고 나면 이 책을 줘야겠다. 혼자가 아님을, 다들 그렇게 살고 있음을, 위로를, 격려를 얻게 하고 싶다.

 

 

  지난 팔 년동안 써놓은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다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나의 문장들도 사실은 나 혼자 쓴 게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나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선물받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에 나는 아직도 설렌다. 인간이 저지르는 숱한 오류와 뜻밖의 강인함과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말 걸기이기도 한 나의 작품들이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놓여 있기를 바란다.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