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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이중섭 지음

다빈치

 

 

  이중섭은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하고(대부분이), 질투의 화신으로 돌변하기도 하며, 자신의 그림이 좋은 평을 받았다며 의기양양 자랑을 하기도 한다. 읽는 내내 닭살이 돋았다. 책을 읽는 중간에 얼굴이 궁금해져 맨 뒷장을 넘겨보았는데, 조금 놀랐다. 여성스러울거라 상상했었는데, 그는 의외로 마초적인 인상이었다. 그렇게 생긴 남자가 이렇게 구구절절한 사랑고백이라니! 멋있다. 하긴, 덕만도 아이들도 상상했던 것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스무 살, 처음 사랑이란 걸 알았을 때, 긴 거리를 두고 반 년동안 연애를 한 적이 있다. 공책에다가 매일같이 편지를 써두었다가,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 그 친구에게 공책을 선물했다. 매일매일이 별 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었을텐데, 나는 그 시절 매일매일 다른 이야기들을 써 내려갔다. 뭐, 이야기의 핵심은 뻔한 것이었겠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매일같이 같은 주제의 이야기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내가 놀라웠다.

 

  이중섭도 매일 같은 주제의 이야기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뭐라뭐라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끄적여놓았지만, 그것의 핵심은 사랑이다. 닭살돋는 사랑고백. 그렇지만, 닭살이 마구마구 돋는 이야기라 민망하다고 딱 잘라 말해버리기엔 그들은 너무 사랑스럽다. 그들은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고, 잘나가는 예술가도 아니었고, 심지어 마씨라는 사람에게 사기까지 당해 빚더미에 앉았다. 그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낙심이란 것은 찾기가 힘들다. 책 곳곳에 그런 기미가 보일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멋지게 사랑으로 덮는다. 그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배울 점이기도 했다.

 

  신랑이 일본에 있었을 때 매일 영상 통화를 했다. 얼굴을 보고 하루의 일과들을 이야기했다. 현대의 방식으로. 우리가 100년 전쯤에 태어났다면 우리도 대향과 만덕처럼 매일 매일 편지를 썼을까. 편지말고는 소식을 알길이 없었던 그 때에 얼마나 편지 한 통이 소중했을까. 책의 초반부에는 소식과 사랑에 조급해하는 이중섭이 우습기도 했는데, 점점 나는 편지 한 통을 읽고 책을 덮고는 그들을 떠올려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여름 방학 때 신랑이 있는 일본에 갔었는데 그는 나에게 편지를 하나 주면서 자기가 출근을 하면 읽어보라 했다. 그 편지는 내가 일본에 가기 전 날에 쓴 것. 일본의 첫 방문 소감은 어떠냐고, 오빠가 살고 있는 방은 괜찮느냐고, 작지는 않느냐고, 그렇지만 괜찮다고, 내일 너가 오는 것에 너무나 떨리고 설레인다고, 널 공항에서 만나면 꼬옥 안아주겠다고, 쓰여있었다. 이중섭 편지의 맨 끝 거의에, '당신의 모든 아름다움을 굳게굳게 포옹하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긴긴 뽀뽀를 보내오'라는 의미의 말들이 있다.

 

  걱정스러웠다. 만덕이, 가난하고 남한테 사기나 당할 정도로 바보같이 순수한 대향을, 게다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사랑고백을 하는 이 남자를, 혹시나 질려하면 어쩌나. 하지만, 책의 중반부에 만덕이 대향에게 쓴 편지 몇 편이 나오는데 그녀의 고백 또한 너무나 믿음직스럽고 예쁘다. 대향의 무한한 긍정과 사랑의 힘 때문인지, 그의 그림들 또한 예쁘고 활기찼다. 소, 닭, 사슴, 새, 사람 할 것 없이, 즐겁고 행복해보였다.

 

  옆에 A선생님이 선물해 준 책이다. 결혼에 여신이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책이랬다. 우리가 못보는(학교에서) 한 달 동안, 서로 읽어보자 했다. 수술은 그 선생님이 하는데 내가 오히려 책을 받았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따뜻한 마음씨가 참 좋은 선생님이다. 이중섭과 그의 가족에게서 배운,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일 수 있는 마음과 응원을 꼭 전하고 싶다.

 

 

 

 

A선생님의 예쁜 마음과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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