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교를 오면서 문득 어떤 이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내가 그를 보지 않은 지난 시간동안 아주 조금, 어쩌면 전부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낯설었고, 내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고 싶지 않았고, 이야기를 할 때는 심각해지지 않았으며, 솔직해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 시절 그 때에,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갔지만, 이젠 그 다른 사람이 그가 되어버렸고, 나는 아직도 그의 그런 모습이 낯설다. 이제 그 사람은 그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테지. 안다. 그 사람을 그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은 나의 몫이란걸. 그 몫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면 영영 그 사람은 나에게 이방인처럼 느껴질 것이란걸. 나는 며칠 전 그를 만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 그를 만났는데도, 내 기억속엔 그가 없다. 내 기억속에 그 만남의 시간에는 어색해하는 나만 있다. 그리고 가끔 그의 말 속에 녹아있는 그 다른 사람에 흠짓흠짓 놀라는 내가 있다. 그렇게 이젠 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서글픔 속에 오늘을 시작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그 '다른 사람'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과 친구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조금이나마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나는 나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해주며 사는 것, 이 세상의 것에 욕심을 부리기보단 저 천국에서 주님이 해 주실 칭찬에 더 욕심을 내며 사는 것, 항상 따뜻하게 다른 사람들을 보며 방긋 웃어줄 수 있는, 먼저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내가 꿈꿔 왔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싶다. 몇 평짜리 집, 어떤 직위, 반에서 몇 등하는 아들 딸, 그런 것에 목메는 삼십대가 되고 싶지 않다. 물론 그들은 그런 나를 보며, 며칠 전 그의 표정처럼, 넌 아직 애구나, 넌 아직 뭘 모르는구나,라는 표정을 지을테지.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런 것에 연연해하면 살고 있을지도 모를테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항상 생각하며 살겠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국의 것을 바라보고 살겠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니까.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내가 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틈 속에서 행복한 발버둥을 치며, 그렇게 살고 싶다.
오늘 중부 지방엔 많은 눈이 내릴 것이라 한다. 나에게 눈은 언제나 좋은 소식이다. 서글픔 속에서 시작한 하루이지만, 그것으로는 끝이 아니라는 좋은 소식이다. 내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겠다는 나의 작은 다짐을 응원해주시는 나의 든든한 아버지, 주님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