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첫 사랑

yodasol 2013. 11. 29. 11:37

  그날 밤 나는 흰 배꽃 사이로 걸어가던 그녀의 무릎 아래서 흔들리던 흰 스커트와 기차 문이 열리자 보였던 그녀의 조그만 발과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옆모습과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 까르르 웃던 그녀의 웃음소리를 나도 모르게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던 것 같다.

  마음과는 달리 몸은 땅속으로 녹아들듯 피곤했기에 나는 씻을 생각도 없이 쓰러져 침대에 누웠고 불을 껐다. 불을 끈 바로 그 순간, 환한 빛 같은 것이 어렸고, 피곤한 내 의식이 문득, 내가 불을 끄지 않은 건가, 착각하려는 바로 그 순간, 그 하얀빛이 그녀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다 의식할 새도 없이 그 하얀 얼굴이 내 갈비뼈를 열고 가슴속으로 쑤욱 밀려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약간의 통증도 동반했던 것 같았다. 나는 경험에 비추어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고, 상대방이 쏜 화살이 내 가슴으로 날아오는 그 시간까지 날아오는 화살이 나를 쓰러뜨릴 것임을 뻔히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지독하게 감미로워서 지독하게 쓰게 느껴지는 고통을, 그러면 안 된다고 아주 조그만 소리로 거부하면서, 기꺼이 느꼈다.

  "왜 사랑하나요?"라는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옳다. "어떻게 그를 사랑하게 되었나요?"라는 질문도 문법적으로 옳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말들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 사랑하는지 이유를 분명히 댈 수 있다면 이미 그건 사랑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먼 훗날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났던 내 동료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A4용지를 건네던 그녀의 손을 본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건 A4 용지 때문도 그녀의 손 때문도 아니었으리라. 대답하자면 그건 그냥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 공지영의높고 푸른 사다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