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yodasol 2017. 12. 7. 16:19

 

  신혼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당시 여행이라곤 학교 선생님과 싱가포르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던 나는 신혼 여행지도 여행사에 가서 상담하던 중 좋아보이는 곳, 남편이 수상 액티비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곳(팔라우라는 나라다. 멋진 나라이다. 그리고 참고로, 나는 물을 엄청 무서워한다)을 즉흥적으로, 그것도 '패키지'로 선택했다. 나는 그 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열 쌍의 신혼 부부들과 대부분의 일정을 보냈었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남편과 나, 둘만 있었던 시간들이다. 둘이 음악도 듣고, 둘이 책도 보고, 둘이 해변에 누워 낮잠을 자던 시간들. 우리는 지금도 이야기한다. 패키지의 신혼여행을 후회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더 신나고 재밌게 놀았을 것이라고. 단 한번뿐인 신혼여행인데, 흑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빠가 젤 멋져보였던 것, 그가 나를 위해 애쓰는 모습에 측은함이 섞인 고마움을 느꼈던 것, 함께 사진을 찍고 함께 즐거워했던 그 기억들은 둘도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 패키지의 가이드가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여러분이 집으로 가시면, 이제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힘든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때론 같이 못살것처럼 싸우기도 할테지만, 여기서 있었던 이 일들이 추억이 되어 여러분을 지켜줄거라 했다. 신혼 여행을 하는 내내 패키지로 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하는 가이드의 눈빛을 보고는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잠시 생각했더랬다.

 

  팔라우의 그 가이드의 말처럼, 이런 추억들이 정말 우리를 지키고 있다.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을 하는 이유가, 나에겐 그것이다.   

 

 

  끄라비에서 우리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지냈다. 아침으로 쌀국수나 족발덮밥을 먹고 썽태우를 타고 해변으로 놀러 갔다. 해변에서 종일 뒹굴다가 오후가 되면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백화점으로 갔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물건들을 구경한 뒤 햄버거나 피자, 아니면 수끼를 사 먹었다. 마트에 들러 간식거리도 조금 샀다. 해변까지 산책을 했다. 선착장 근처에 가면 호객꾼들이 말을 걸었다. "라일레이 해변에 안 갈래요?" 관심이 없다며 고개를 저으면 그들은 환하게 웃었다. 제의를 거절해도 그들은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해가 지면 야시장을 기웃거렸다. 연인들, 친구들, 가족들 사이에 끼어서 맥주 한 잔을 사 마시거나 수박 주스를 마시거나 했다. 그렇게 빈둥대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치 고향 같은 곳에서. 나는 이 도시가 좋았다. 매일 이렇게 살다가 이곳에 뼈를 묻어도 좋을 것 같았다. p.66

 

 

  나는 주로 지나치게 비판적이다가 가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낙천적이 되어 이상한 짓을 하곤 하는 여자인데, 그런 현상을 일컫는 말이 있다. 바로 현실 도피. p.69 (이 부분을 읽으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내가 딱 그렇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수로 큰 돈이 들어가게 된 일이 있으면, 난 쿨하게, 이러려고 돈 버는건데 뭐, 괜찮아,라고 말하는 식이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참 대범하다고, 그런 면은 자기보다 낫다고 말해주었는데. 그건 대범한게 아니라, 현실도피였구나.)

 

 

  우리는 공항 근처의 한식집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별로 맛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나는 신혼여행 때는 절대로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비행기라면 지긋지긋했다. 먼 나라도 싫고, 서양식 식사도 싫고, 리조트가 제일 싫었다. 대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규슈에 가자고 했다. 가서 매일 기차를 타고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매일 밤 다른 숙소에서 잠을 자고,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쇼핑도 하고, 신나게 놀자고 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거나 어울리지 않고 둘이서만 놀자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p.110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시간을 산다. 그런데 이 시간이 나만의 시간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시간은 기나긴 시간 속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 이 시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시가느이 연장선 위에 있다는 것, 나 역시 그들처럼 어느 순간에는 사라져 버릴 운명이라는 것, 그리하여 결국 나와 세계는 이어져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또, 그래서 이상하게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그런 것을 말로도 글로도 정확시 설명은 못하지만(천재들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타고난 둔재다.) 그냥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어쩌면 앙코르와트에 처음 도착해서 부처의 웃는 얼굴을 발견한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건 열여덟 살에 수학여행을 갔던 제주도에서 친구들과 밤거리를 걷다가 다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P.168-169

 

 

  우리는 튜브에 엉덩이를 끼우고 강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강바람은 시원하고 강물은 따뜻했다. 주위는 고요했고 양 옆으로는 절벽이 펼쳐졌다. 하늘은 푸르렀다. 정말 근사했다. "좋구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다들 튜브 위에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힌 채로 이 순간을 만끽했다. 이 순간을 위해서 한국에서, 영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엉덩이에 쥐가 나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 별것도 아닌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행복이나 만족감이라는 건 별것도 아닌데서만 찾을 수 있는게 아닐까. 이 순간 이대로 죽어버려도 좋겠다는 느낌은 나 자신이 나를 둘러싼 것들에서 분리되어 있지않다고 느낄 때, 그러니까 나 자신과 세계가 완전히 일치될 때, 어떤 괴리감도 느껴지지 않을 때,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그 순간 나는 그저 만족스러왔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p.208-209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까지도 자주 떠오르는 기억은, 무거운 튜브를 짊어지고 걸어가던 땡볕 길과 손바닥만 한 좌판을 펼쳐 놓고 과자를 팔던 아저씨와 라인과 토마토가 든 맛없는 국수와 태국으로 떠나기 전 비엔티안 길바닥에서 보낸 하릴없는 시간들이다. p.214

 

 

 

  아들이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겨우 교사가 되었을 때, 근무하는 학교로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한다. 아버지의 특유의 무심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이런저런 일들을 별 뜻 없이 적은 편지였다. 그런데 페낙은 아버지가 봉투에 쓴 주소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다니엘 페나키오니'라는 아들의 이름을 쓰는 대신 '다니엘 페나키오니 선생님'이라고 쓴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이런 말을 덧붙인다.

  선생님... 아주 정확한 아버지의 필체로 말이다. 그 기쁨의 함성과 안도의 한숨소리를 듣기 위해 내 삶 전체가 필요했을 것이다. p.316-317

 

  이 글은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다, 작가 디니엘 페낙이 쓴 책을 인용한 구절이다. 우리 아빠도 가끔 나를 이 선생이라고 부를 때가 있다. 뿌듯함과 기분 좋음이 섞인 목소리다. 그런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참 대견스럽고, 학생이 없고 수업이 없으면 참 할만하다는 이 직업도, 고맙다.

  

 

  호텔 근처의 편의점에 들러 간식도 사고 맥주고 샀다. 비좁은 욕조에 몸을 구겨 넣고 들어가 있으면 다리의 피로가 서서히 풀렸다. 질식하지 않기 위해 욕실 문을 활짝 열었두었다. 나는 오랫동안 목욕을 하면서 맥주를 마셨다. 그러고 나면 얼큰하게 취했고 이내 온갖 심적 고통이 물밀 듯이 밀려와서 침대 위를 뒹굴며 온각 추태를 다 부렸다. 혼자 오길 잘한 것 같았다... 밤다가 그렇게 목욕을 하고 맥주 한 캔에 취해 한 시간쯤 나뒹굴다 보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발랄하게 우에노역으로 걸어가서 맥도날드의 형광 불빛 아래서 커피를 마셨다. 그때만 해도 일본 맥도날드는 매장안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이었다. 2층에는 담배를 피우며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싸구려 옷으로 멋을 낸 노란 머리의 여자애가 혀짧은 발음으로 누군가와 끝도 없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칙칙한 옷차림의 노인들이 어깨를 숙인 채로 테이블 위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들 틈에 둘러싸여 커파를 홀짝거리고 있으려니 어떤지 기분이 훨씬 나아지는 것 같았다. p.372-373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이다. 145쪽.

 

  하지만 여행을 할 때 나는 거의 누워 있다. 어딜 잘 가지도 않고 뭘 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적당한 장소를 찾아 눕거나 널브러져 있다. 누워서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한다. 한번 누우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행에서 배운 전부인지도 모른다. 누울 줄 아는 것. 누워 있는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아, 여행가고 싶다아-